2011/08/21 12:46

예전엔 영화를 보면 영화 감상을 적었다. 그런 게 공부가 될까 싶어서. 하지만 지금은 안 쓴다. 감상평을 쓰면 쓸수록, 남의 작품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깊어질수록 나의 세계는 좁아지고 옅어지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모처럼 자료를 정리하다가 영화 <도그빌>(Dogville, 2003)을 보고 내가 쓴 감상평을 찾았다. 사실은 2008년 경에 쓴 영화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2008)에 대한 감상평에 들어있던 내용이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니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일단 그 중 일부를 발췌한다: 


배트맨은 폭력 행사는 물론, 사생활 감시라는 '빅브라더'의 역할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바로 <다크 나이트>, 더 나아가 서구식 담론의 한계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과거 <도그빌>(Dogville, 2003)에서 보았던 한계 그대로다. 계몽주의의 화신으로 순교자적 희생을 감내하던 그레이스(니콜 키드만 분)의 최종 결론은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은 마을 주민에 대한 철저한 학살이었다. 그것도 아버지의 압도적 힘을 빌어서. <도그빌>이 탈계몽주의의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영화가 아닌 다음에야 영화의 결론은 '문명화'를 핑계로 타 문화권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던 과거 서구 열강 제국주의자의 낡은 논변에서 한발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그 때도 무력 침략에 앞서 선교와 교육 활동이 먼저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처럼 어둠의 영웅, 필요악에 대한 옹호는 과정과 수단을 무시하는 결과 지상주의로 이어지기 쉽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것이다. '최악'을 막기 위한 '차악'은 차악일 뿐 '최선'이 아니다. 당연히 차악 역시 극복해야할 대상이지 추구하고 영웅시할 가치가 아닌 것이다. 그나마 <다크 나이트>가 <도그빌> 보다 나은 점은, 최소한 배트맨은 한 마을을 몰살한 후 득의양양하게 아버지의 차를 타고 돌아가는 그레이스처럼 뻔뻔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은 개에게 쫒기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한다. 


심지어 2005년에 내가 쓴 감상에선, <도그빌>의 진정한 얼치기 지식인이 톰인지 그레이스인지, 또 둘 중에 한 명을 꼭 죽여야 한다면 우리는 누구를 죽여야 하는지 반문하고 있었다. 이처럼 <도그빌>에 대한 내 감상은 한마디로 위험하고 폭력적이고 불순한 영화라는 것이었다. 이게 천재 감독의 걸작이라는 찬사가 이어졌던 <도그빌>에 대한 내 솔직한 평가였다.

그러다가, 올해 <도그빌>의 감독 라스 폰 트리에의 망언이 칸에서 터져 나왔다:  


"나는 정말 유대인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러다가 내가 진짜 나치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 가족은 독일인이었는데 이것이 나에게 기쁨을 주기도 했다"

"히틀러를 이해한다. 그는 좋은 사람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나는 그를 많이 이해한다. 조금은 그에게 공감도 한다"

"유대인을 조금은 싫어한다. 이스라엘은 골칫거리이기 때문이다."

"좋다. 나는 나치다. 예술의 측면에서라면 나는 스피어를 지지한다. 그는 신이 나은 최고의 인간이다"


이런 트리에의 망언에 사람들은 놀랐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는 <도그빌>이라는 괴작을 만든 감독이었으니까. 마지막 대학살극을 보며 관객들이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의가 승리한 듯 후련한 기분을 느낄 수 있게 치밀한 플롯을 짜놓은 감독이었으니까. 

문제는 그 괴작이 결과적으로 재앙과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77명의 무고한 생명을 학살한 노르웨이의 테러범 브레이비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자신이 세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가 <도그빌>이라고 밝힌 것이다( 나머지 두 개는 글레디에이터와 300). 내가 <도그빌>에서 받았던 위험한 메세지를 브레이비크 역시 고스란히 받았던 것이다. 실제로, 우퇴위아 섬에서 자행된 브레이비크의 참혹한 학살 과정은 <도그빌>의 마지막 장면과 유사하다. 



브레이비크가 <도그빌>을 봤기 때문에 테러범이 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트리에 감독의 주장과는 달리 <도그빌>은 폭력을 경계하고 고발하는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폭력에 대해선 정당성을 부여하는 메세지를 담은 영화이고 이런 메세지는 어떤 사람들에겐 분명하게 인지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실이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 의미가 있다. 최소한 나는 명작과 괴작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으며, 은폐된 위험을 감지할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된다. 이 증거는 내가 내 작품을 충분한 수준에서 통제하고 있다는 믿음을 주고 이 믿음은 내가 표현의 자유를 조금 더 과감하게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명분을 준다.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 나 자신에게. 이 안목이, 이 감각이, 내가 창작을 하는 기준이 된다.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은 누구나 나는 착한가? 나는 영리한가? 나는 잘 생겼나? 나는 철이 들었나? 나는 능력이 있나? 나는 인격이 고매한가? 나의 취향은 보편적인가? 나는 자질이 있나? 나는 자격이 있나? 등의 수많은 의문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런 식의 시작과 끝이 없고 기준도 없는 의문에 대한 정답은 그 누구도 줄 수 없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다만 주위의 평가, 이루어 놓은 객관적 성취, 혹은 특별한 체험이 자기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데 너무 의미없지는 않은 조촐한 단서가 될 뿐이다.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너무 희미하지는 않은 작은 거울이 될 뿐이다.


창작의 과정에서 나를 괴롭히던 여러 질문들, 나를 몰아붙이던 여러 논리들, 나를 움츠려들게 만드는 내면의 목소리들, <도그빌>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은 그런 나에게 작은 디딤돌이 되어 주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나는 잘못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한 발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SY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