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상, 장인과 예술가의 행동윤리, 즉 '완성도'와 '성찰도'는 반비례 관계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인정한다. 여기서 장인은: 높은 수준의 기술적 역량을 보유한 전문가를 말하고, 예술가는: 사전적 의미보다는 아도르노의 예술, 즉 '미적 쾌락의 극대화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성찰의 기능을 잃어버린 합리적 이성, 계몽의 폭력에 맞서 '버티는' 최후의 보루로서의 예술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계몽이라는 것 자체에 지배계급의 지배이데올로기를 학습(세뇌) 시키는 기능이 내재되어 있음을 직시했을 때, 사실 사회화(문명화)는 물론 미적 쾌락이라는 주관적 만족도조차 시장의 수익성이나 사회 담론의 트렌드 등에 따라 합리적으로 계량화되어 급(class)을 형성한 후, 권력을 획득해, 타자를 억압하는 동시에, 획일화를 조장해 다양성을 축소시키기에, 어떤 사회에서 합의된 '미(美)'라는 것 역시 예술이 맞서 버텨야 할 대상일 뿐이다. 보편성이란 보편적이지 못한 것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낳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도르노는 불협화음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기도 했다.
따라서 장인은 문화산업의 권력으로서 자본의 첨병일 뿐이고, 이런 장인들의 익숙한 문법에 저항함으로써 오히려 예술이 매개하는 행복을 온전히 누리게 되는 것이다. 즉 사회가 함부로 보편성을 정의하는 것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대 예술은 난해하고 기괴하다. 예전에 많이 시끄러웠던 "정상-비정상" 논쟁이나 "다양성의 존중" 운운이 다 이런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문제는, 그나마 별로 다르지도 않는 시도를 수시로 반복하는 행태에 있다. 예컨대, 얼마 전 MBC에서 방송했던 '베토벤 바이러스'에 나왔던 존 케이지의 <4'33'>의 경우, 처음 그런 '새로운' 형태의 음악이 나왔다면 예술이겠지만, <4'33'>라는 묵음 음악을 수시로 연주한다던지 <5'33'>, <10'33'>라는 식으로 유사한 시도를 반복한다면 이는 전혀 예술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게다가 달라져야 하는 이유를 망각한 채,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다면, 즉 새로운 형태는 있되 그 안에 의미가 없다면, 이 역시 "새로운 게 좋은 것이다"라는 낡은 근대주의 명제의 연장일 뿐이다. 요컨대, 예술가는 의미 있는 메시지를 새로운 형태로 표현해 전체주의 사회에 대항하는 게릴라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필연적으로 예술가는 소수 엘리트 선각자들이 독점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대중은 무기력한 우중으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아도르노 역시 엘리트주의자였다.
하지만 예술의 목적이 전체주의 사회 속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자연과 공존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라면 이게 소수 엘리트들의 선도적 활약만으로 가능할까? 그게 불가능하다면 애초에 한계가 명백한 방식을 교조적으로 따라갈 이유가 있나?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니 보라는 달은 안보고 손가락만 본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예술가란: 기존 담론의 확대재생산을 통해 이미 획득한 기득권을 보전하려는 부류가 아니라, 다른 것을 나쁜 것이라 여기지 않고 패를 지어 몰려다니며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핍박하지 않는 사람들 일반을 가리키는 보다 느슨한 용어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