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04 12:37

"전문적인 수학자가 수학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은 우울한 경험이다. 수학자의 본분은 무언가 새로운 정리를 증명하면서 수학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지, 자신이나 다른 수학자들이 이루어 놓은 것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가가 정치 기자들을 경멸하고 예술가가 미술 평론가들을 혐오하는 것처럼 생리학자, 물리학자, 수학자들도 대개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다. 창조하는 사람이 해설하는 사람에 대해 갖는 경멸감은 무엇보다 의미심장하고 명백히 정당한 것이다. 설명이나 비평, 평론 등은 이류급 인간들이 히는 일이다." (G.H. 하디, 어느 수학자의 변명, p.15)

 

 

하디에 따르면 { 수학자=창작자 > 비평자 }인 셈이다. 나는 비평도 또 다른 창작이라고 생각하기에, 하디의 주장에 반만 동의한다. 또 그렇기에 비평자는 창작자의 창조물을 토대로 자신의 비평을 창작했음을 유념하고 창작자의 의도는 창작자의 영역에 남겨두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간혹 비평자가 심지어 관심법(觀心法)까지 동원해 자기 생각을 마치 창작자의 의도인 양 독자에게 전달하거나 창작자의 의도를 왜곡하는 경우가 있는데, 남의 의도를 온전히 이해하고 대신 독자에게 전해줄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무리이고 만용이다. 창작자의 의도는 오직 창작자 본인만이 제대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창작자의 의도가 궁금하다면 관심법을 동원해 억측하지 말고 창작자 본인에게 직접 물어볼 일이다.

 

그러니,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창작자의 것은 창작자에게!"

 

더 나아가, "남의 생각을 함부로 단정하지 말고 제 아무리 익숙한 내용 같아 보여도 마치 처음 접한 현상인 양 낯설게 바라볼 것, 그리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면 꼭 당사자의 입을 통해 진의를 확인 받을 것."

 

니체의 말처럼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만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므로, 비평자나 독자 역시 창작자의 의도 자체가 아니라 창작된 작품을 통해, 자기 과거 경험을 토대로, 자기가 아는 범위 내에서, 결국 자신만을 경험하는 것이다. 전혀 낯선 것조차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것으로 오인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이미 내 것이 아니었던 것, 내가 아직 모르고 있던 것에 대한 학습이나 탐험은 먼저 낯설게 바라봄으로써 편견을 줄인 상태에서, 진의에 도달하기 위한 지난한 피드백을 필요로 한다.

 

말이 쉽지, 나도 노력은 하는데 체화가 잘 안 된다. 조금만 방심하면 마치 남의 머릿속을 들여다 본 양 착각에 빠져 상대의 진의를 오판하는 실수를 저질러버린다. 나중에 깨닫고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반성하는 일이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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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YG
2011/03/25 14:03

1. <나는 가수다>의 방송취지, 방송포맷, 방송규칙에 대하여

 

어쩌면 <나는 가수다>와 관련해 발생한 혼란은 용어의 부적절한 사용에서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부터 보다 엄밀한 용어를 사용하기 위해서 먼저 용어부터 정리하겠다. 다음은 <나는 가수다> 홈페이지에 있는 프로그램 설명이다.

  

 ( http://www.imbc.com/broad/tv/ent/sundaynight/ )

 

해당 부분을 정리해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 방송취지: 아이돌 그룹들과 댄스음악으로 편향된 방송 가요계에 다양한 음악이 공존하는 무대! 진짜 가수들이 설 수 있는 무대를 만든다! 

  • 방송포맷: 대한민국 최고 가수들의 노래 대결. 레전드급 가수들의 극한 서바이벌! 가수들의 진지한 음악관과 개그맨들의 엉뚱함을 믹스. 

  • 방송규칙(노래 대결이라는 포맷의 세부 규정): 한 사람은 탈락해야 한다!!!

 

이처럼 논란이 된 탈락여부는 방송취지도 아니고 방송포맷 자체도 아니고 기껏해야 방송포맷을 구성하는 일개 요소인 방송규칙에 불과하다 (탈락∈규칙, 규칙⊂포맷). 그런데 지난 <나는 가수다> 3회에선, {7위는 탈락이라는 규칙, 지속 가능한 방송포맷 개발, 출연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라는 3개의 가치가 서로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즉 규칙에 따라 김건모를 그냥 탈락시키자니 다른 출연자들이 받은 충격이 너무 커 남은 녹화는커녕 프로그램의 존속까지 어려운 상태였던 것이다.

 

이는 규칙보다 더 중요한 방송포맷과 방송취지의 실현이 힘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국민가수 김건모조차 첫 번째 경연에서 탈락할 수 있다면 심지어 조용필이 나와도 운 나쁘면 2주 동안 단 한 번의 무대밖에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이 되고, 그렇다면 이렇게 부담은 엄청나면서 기대효용은 떨어지는 프로에 명성 있는 중견 가수가 출연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오려는 좋은 가수가 없으면 당연히 프로그램도 지속될 수 없다. 이른바 "지속가능한 방송 포맷"이 아니게 되었다는 말이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소라를 위시한 출연자와 제작진은 이를 온몸으로 직감했던 것 같다. <나는 가수다> 제작진과 출연자들은 잠시 진행을 멈추고 원점에서 재검토를 했고 그 결과로 {방송규칙 준수, 방송포맷 개발, 출연자 배려}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은 게 바로 재도전 제도의 도입인 것이다. 

 

방송이 유지된 다음에야 방송취지도 실현될 수 있는 것이기에, 출연자를 배려해 방송규칙을 수정한 그들이 옳다. 실제로, 재도전 허용으로 인해 <나는 가수다>의 운신의 폭이 급격히 확장되었다. 일단 가수로선 재도전의 기회를 보장받기에 출연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었고, 원한다면 최소한 4주의 방송분량도 확보할 수 있기에 결과적으로 출연에 대한 기대효용은 증가했다. 제작진으로선 그만큼 출연자 섭외가 용이해졌으니 방송이 유지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 것이다. <나는 가수다>가 시행착오를 통해 결과적으로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응원해 주는 게 맞다.

 

2. 약속과 설명에 대하여

 

  • 약속: 다른 사람과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정하여 둠.
  • 설명: 어떤 일이나 대상의 내용을 상대편이 잘 알 수 있도록 밝혀 말함. 또는 그런 말.

 

MBC측은 '7위 득표자 탈락'은 시청자와의 약속이기에 기본 원칙을 지키지 못한데 대한 책임을 물어 김영희 피디를 경질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7위는 탈락'을 "약속"으로 규정하면 여러가지 논리적 문제가 발생한다.  예컨대, 어떤 두 사람이 "우리 2시에 여의도에서 만나자"라는 약속을 했는데 누군가 약속을 어기고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나간 사람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욕먹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나는 가수다>가 7위를 탈락시키지 않아서 시청자들에게 어떤 피해가 발생했나? 

 

방송에서의 약속은 다수 대중을 상대로 한다는 점에서 정치인의 공약과 비슷하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예컨대, 어떤 정치인이 "만화산업 육성에 2조를 투입하겠습니다."라고 공약을 걸었으나 실제로 이행하지 않았다면 약속을 믿고 표를 준 국민들의 뜻을 대변하지 않은 것이니 욕먹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나는 가수다>가 7위를 탈락시키지 않아서 시청자의 어떤 뜻이 대변되지 못했나? 아니, 그전에 누구를 탈락시켜야 한다는 뜻이 시청자에게 있기라도 했나? 하물며 직접 한 표를 행사한 500인의 청중 평가단도 가장 마음에 드는 가수를 선택했지 탈락시키고 싶은 가수를 선택한 게 아니다. 그렇다면 '7위는 탈락'이라는 "약속"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고 누구를 위한 것이며 누구를 위해 지켜져야 하는 것인가? 

 

이런 설명하기 곤란한 문제들은 약속이 아닌 것을 무리해서 약속으로 규정하려니 생기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7위는 탈락됩니다.'를 "약속"이 아니라 "설명(규칙을 시청자에게 알리는 행위)"으로 이해하는 순간 사라진다. <나는 가수다>의 "약속"은 방송취지에 그대로 드러나 있듯이 '레전드급 가수들의 멋진 무대로 재미와 감동을 주는 것'이고 '7위는 탈락합니다.'라는 부분은 '7위는 탈락'이라는 규칙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재도전을 허용함으로써 규칙이 바뀌었으니 앞으로는 '7위는 재도전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라고 고쳐서 다시 설명하면 된다. 그럼 시청자는 이 바뀐 설명을 듣고 앞으로 방송시청의 참고로 삼을 것이다. 그래서 지난 3회에 규칙을 바꾼 이유와 바뀐 규칙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원칙"이라니? 원칙은 다른 규칙들의 근본 규칙으로서 다른 규칙이 변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는 최후의 규칙이다. 소위 "끝판 대장"이다. 따라서 원칙이 되려면 마지막까지 지켜야할 가치가 있어야 한다. 이게 "악법도 법이기에 일단 지켜야한다."라는 말이 원칙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7위는 탈락'도 규칙이기에 일단 지켜야한다."라는 말에도 원칙으로 삼을 정도의 가치는 없다. 게다가 규칙의 개정만으로도 덩달아 달라지는 설명 따위가 어떻게 원칙의 구성요소가 될 수 있겠는가. 

 

3. 원칙과 정의에 대하여

 

  • 원칙: 어떤 행동이나 이론 따위에서 일관되게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나 법칙.
  • 정의: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

 

"김건모는 탈락해도 김건모다." <나는 가수다>를 비난하는 네티즌들이 자주하는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김건모가 7위로 탈락해도 김건모의 실력이나 명성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니 재도전하지 말고 처음의 규칙에 따라 쿨하게 탈락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즉 네티즌들은 김건모의 탈락여부가 아니라 사전에 공지된 '7위는 탈락'이라는 규칙인 지켜지지 않는 상황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네티즌들의 입장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탈락시키기로 했으면 그 대상이 누구든지 꾸물대지 말고 빨리 탈락시켜"가 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탈락이 남의 일이니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네티즌들은 기존의 탈락 방식이 가수들에겐 엄청난 고통이라는 사실을 방송에서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고통이기에 마음 놓고 남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가수다>가 시청자에겐 그저 일요일 밤의 재미겠지만 출연한 가수들에겐 삶 자체가 연관된 극한의 무대다. 이런 부담에도 불구하고 가수들이 탈락에 연연하지 않고 그 과정을 즐겼다면 모르겠으나 당사자들이 고통스러워 규칙의 개정을 원했다면 규칙의 개정은 당연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 어떤 재미도 남의 고통으로부터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게 성숙한 사회의 "원칙"이자 "정의"이기 때문이다. "'7위는 탈락'도 규칙이기에 일단 지켜야한다." 따위가 아니라 이런 게 바로 소위 "원칙"이다. 이런 원칙과 정의는 방송포맷 하부의 규칙 준수보다 무조건 우선한다.

 

2차 세계대전의 전범재판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는, 유태인 학살은 '악한 의도'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음'에서 비롯되었다고 결론 내렸다. 나치 수용소 군인들은 유태인 학살에 대한 가치판단 없이 사전 고지된 절차와 규칙에 따라 유태인들을 가스실로 보낸 것이다. 그런데 이들 군인들과 규칙의 시행을 강요하는 네티즌 사이에는 상대의 입장에 대한 역지사지적 고려와 이심전심적 연민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네티즌들 역시 기존의 탈락 방식에 대한 가치판단 없이 사전 고지된 절차와 규칙에 따라 가수의 탈락을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은 '전기의자 실험'을 통해 권위자의 지시 혹은 사전 규칙에 따라 타인의 고통에 쉽게 눈감는 사람들의 행태를 잘 설명한 바 있다.  

 

개중에는 긴장감 넘치는 자극적인 재미를 위해 서바이벌이라는 포맷과 탈락이라는 규칙을 보다 엄정하게 적용해줄 것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남의 고통을 전제로 한 이기적인 재미는 반드시 지양되어야 한다. 나는 <나는 가수다>가 좀 덜 스릴 있더라도 아주 오랫동안 방송되었으면 좋겠고, 출연한 가수가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무대를 미련이 남지 않을 정도로는 보여줬으면 좋겠다. 

 

4. 청중 평가단의 투표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비판에 대하여

 

<나는 가수다>가 500인의 청중 평가단의 투표행위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는 비판이 있다. 그렇다면 500인의 청중 평가단이 배신감에 소송을 걸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나는 가수다>가 사기죄로 입건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공연을 관람하고 한 표를 행사한 당사자들은 가만히 있는데 제 3자들이 <나는 가수다>을 비난하기 위한 명분으로 그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뿐이다.

 

정치인의 선거는 투표의 '의도'와 투표의 '기능'이 일치한다. 자기가 뽑고 싶은 사람에게 투표를 하면 그 표가 그 후보의 당선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런 절차는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국회의원들의 입법을 통해 법률에 명시된 것이기에 정당성이 있다. 하지만 <나는 가수다>의 투표는 성격이 좀 다르다. 500인의 청중 평가단이 가장 마음에 드는 가수에게 투표하면 그 표가 그 가수가 1위가 되는 것에 기여하는 것까지는 일반적인 선거 투표와 비슷하지만, 이 투표는 사실상 집계 결과에서 7위를 한 출연자를 탈락시키는 기능을 한다는 점이 다르다. 즉 '의도'와 '기능'이 불일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투표에 참여한 500인의 청중 평가단은 물론이고 시청자 그 누구도 탈락자를 지명한 바 없다. 따라서 청중 평가단의 투표를 <나는 가수다> 제작진이 임의로 재해석해 탈락자를 선정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투표자의 의사에 반하는 월권행위이다. 예컨대 "어떤 가수의 무대가 가장 좋았습니까?"라는 질문과 "어떤 가수의 무대가 가장 나빴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순위 결과는 다를 수 있고, 심지어 "어떤 가수의 무대가 가장 나빴습니까?"와 "어떤 가수를 탈락시키고 싶으십니까?"라는 질문의 결과도 다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가수다>는 "어떤 무대가 가장 좋았습니까?"라고 묻고는 그 결과를 물경 탈락의 근거로 전용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온 '7위는 탈락'이라는 규칙은 조금의 정당성도 없다.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규칙이라도 당사자인 가수와 개그맨이 동의했다면 그다지 문제될 게 없다. 문제는 동의를 철회할 때이다. 그런데 지난 3회에서 가수들과 개그맨들은 기존 규칙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표명했다. 최소한 이소라와 김제동의 경우는 방송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그렇다면 제작진이 만든 이상한 규칙은 존립 근거가 없어진다. 따라서 바로 폐기하고 다른 방식을 찾아야한다. 굳이 비유하자면 SM과 소속가수들이 13년 전속계약을 맺었다고 하더라도 당사자인 가수들이 도중에 문제성을 인식하고 이행을 거부한 경우, 법리적 검토를 통해 문제가 인정되면 계약기간 13년은 제 아무리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인정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 <나는 가수다>의 이상한 탈락 규칙은 너무 이상해서 따로 검토조차 필요 없는 사안이다. 이처럼 7위는 탈락이라는 규칙은 정당성이 없기에 적용을 강요할 수 없다.

 

<나는 가수다>에서 이루어지는 선호도 투표는 청중 평가단이 원해서 권리차원에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제작진이 방송 진행상 순위를 가려야 하기에 협조를 구하는 형식이었다. 즉 제작진이 투표를 요구하니까 하는 것이지 청중 평가단이 한 명을 떨어뜨리고 싶어 자진해서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탈락자에게 재도전 기회를 부여해도 청중 평가단이 배신감을 느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청중 평가단은 어쩌면 자신의 투표가 출연가수의 탈락으로 바로 이어지지 않는 개정된 규칙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책임소재가 분산될 때 청중 평가단의 어깨가 더 가벼워지고, 더 마음 편하게 공연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최고의 가수들이 보여주는 수준높은 공연을 마음껏 즐길 수 없다면 그게 더 안타까운 일이다.

 

5. 출연자들의 처신과 제작진의 편집 미숙에 대하여

 

(1) 출연자들의 언행에 대하여

 

김건모: 규칙을 개정해 재도전을 하나의 선택지로 만드는 것에 동의하더라도 김건모까지 그 새로 바뀐 규칙의 적용을 받을 필요는 없다는 반박이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만약 김건모가 재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이게 선례가 되어 이후로 재도전이라는 선택지는 유명무실해질 위험이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가수다>를 긍정한다면 김건모의 재도전도 긍정하는 게 맞다.

 

이소라와 김제동: 이 두 사람은 서바이벌 규칙에 동의하고 <나는 가수다>에 출연했으나 막상 그 중 한명이 탈락해야 하는 상황이 되니 '뭔가 잘못되었다' 내지는 '이게 아니다'라는 판단이 들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관성에 따라 상황을 진행시키기 보다는 모든 상황의 진행을 중지시키고 원점에서 다시 재검토하는 게 맞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나온 것이 재도전 제도이기에 이소라와 김제동의 당시의 처신은 적절한 것이었다.

 

박명수: 굳이 잘못 처신한 출연자를 한 명 꼽으라면 제작진이 진행하라니 별다른 고민 없이 진행한 박명수이다. 잃을 게 없는 박명수는 "개그맨"으로서 상황을 진행시켰지만 심각한 부작용을 직감한 이소라는 "가수"로서 진행을 거부한 것이다. 이소라의 "나 방송 못하는데 왜 방송 진행하고 난리야. 이거 편집해달라고 할거야. 이렇게는 못해."라는 발언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박명수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사실 출연자 모두가 별로 잘못한 게 없다.

 

(2) 방송의 편집에 대하여

 

방송 후반부의 어수선하고 가수들을 보호하지 않는 듯한 편집에 대한 비판이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재도전 허용의 명분은, 고통을 느낀 당사자인 가수들과 프로그램을 직접 제작해야 하는 제작진이 서로 합의를 본 대안이었다는 데서 나오는 것이기에, 이 과정을 편집하지 않고 방송으로 내보낸 것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곰곰이 방송 내용을 돌이켜보면 방송 후반부는 버릴 게 하나도 없을 정도로 시청자에게 반드시 보여줘야할 장면과 설명해야할 내용만으로 밀도 있게 꽉꽉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후반부는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해 구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규칙 개정의 정당성을 논리적인 설명을 통해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시청자가 원한 것은 그저 재미와 감동이었는데 제작진은 자신들의 규칙개정과 처신에 대한 명분을 제시하는데 급급했다는 데 있다. 이런 편집은 시청자 일반이 아니라 다른 전문가와 여론주도층(그냥 언론이라고 하자)과의 소통에 중점을 둔 것이니 굳이 문제를 삼으려면 삼을 수도 있겠다. 예컨대 자신의 배려부족으로 마음이 상한 연인 앞에서 자기 처신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양상이니 말이다. 경험에 비춰보면, 이런 설명은 대개 그다지 소용이 없다. 제작진의 정공법적인 방식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효과가 떨어진다는 말이다.

 

이런 패착은 예상되는 언론의 비판에 제작진이 미리 너무 겁을 먹었기 때문인 것 같다. 언론의 비판을 모면하기 위해서 명분 제시에 급급하다가 시청자들이 원한 재미와 감동에 소홀해진 것이다. 문제는 언론의 행태이다. 김영희 피디가 방송과 언론 인터뷰에서 규칙 개정의 명분과 과정의 적합성에 대해 그렇게 상세하게 설명을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수다> 사태가 이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논란을 부추기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이 문제는 아래 '7항'에서 다시 다루겠다.

 

오해를 막기 위해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이 글의 논지는 "재도전 허용은 잘못된 선택이지만 지금의 비난은 정도가 과하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재도전 허용은 원칙적으로, 그리고 정의라는 관점에서 바람직한 선택이었다."는 말이다. 즉 이소라, 김제동, 김건모, 김영희 모두 옳게 처신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비난은 적절하지 않다는 말이다.

 

6. 규칙 개정에 대한 사전공지가 미흡했다는 비판에 대하여

 

재도전을 허용하는 규칙의 개정이 있은 후에도 이를 미리 시청자에게 공지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제작진의 실수이다. 여기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제작진은 실제 방송에서 바뀐 규칙에 대해 다시 설명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시청자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었다. 배려를 받지 못한 시청자의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기분이 상한 시청자는 비협조적이 되거나 심하면 난동을 부리게 되어 있다.

 

하지만 애초에 시청자들이 원한 것은 누군가의 탈락 그 자체가 아니라 서바이벌이라는 포맷과 7위는 탈락이라는 규칙을 통해 재미와 감동을 얻는 것이기에, 방송을 통해 충분한 재미와 감동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재도전에 대한 사전 공지 미흡만을 문제삼으면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하물며 <나는 가수다>는 서바이벌이라는 포맷을 그래로 유지한 상태에서, 7위는 탈락이라는 기존 규칙에 대한 완충장치로, 재도전이라는 규칙을 하나 더 첨가한 것뿐이다. 이정도의 규칙 개정이라면 사전 공지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시청자가 용납 못할 수준은 아니다.

 

성경은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고 했고, 공자는 '과실을 보면 그 인(仁)함을 안다'고 했다. 군자는 군자다운 실수를, 소인은 소인다운 실수를 저지르는 법이니 어떤 사람의 실수를 보면 그 사람이 군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가수다>가 범한 사전공지 미흡이라는 실수는 시청자에게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주거나 시청자를 낚는 재미를 만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청자들에게 더 많은 재미와 감동을 주려는 좋은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굳이 따지면 군자다움에서 나온 착한 실수이니 이해의 여지가 있다는 말이다.

 

 

7. 논란이 지나치게 과열되고 감정적으로 흐른 이유에 대하여

 

앞서 언급한 절차와 규칙에 대한 준수 요구만으로는 <나는 가수다>에 대한 비난 광풍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우리나라는 규칙준수를 그렇게 까다롭게 요구하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완고한 원칙주의자 보다는 오히려 융통성 있는 변칙주의자를 더 높게 평가하는 나라이지 않던가. 논란이 지나치게 과열된 이유는 내가 보기에 다음과 같다.

 

(1) 속상한 일부 네티즌의 감정적 배설

 

<나는 가수다>를 필요이상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은 누군가 탈락할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를 내면화하고 있었는데, 방송이 재도전을 허용함으로써 자신의 믿음과 기대가 배반당하자, 결과적으로 자신이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를 미리 알려주지 않은 제작진의 배려없음에 기분이 상했던 것이다. 기분이 상하자 감정적인 화풀이를 시작했고, 자신의 화풀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원칙"이니 "시청자와의 약속"이니 그럴듯한 핑계 꺼리를 끌어들인 것이다. 어설픈 핑계는 비판을 부르고 비판을 당하자 인지부조화 상태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공격적인 논리들을 신념화한 것이다. 마치 <나는 가수다>를 처단해야 공정사회가 이룩되는 것 마냥.

 

요컨대 낚여서 기분나쁘다는 사소한 이유로 <나는 가수다>의 제작진과 가수들을 죽어라 까댄 것이다. 자기 손가락에 박힌 가시 하나에 유난 떨며 남의 등에는 칼을 꽂은 것이다. 자신은 가벼운 비판만 당해도 정신을 거의 잃을 정도로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토끼 같은 사람들이 남을 비판할 땐 거의 불감증 수준에서 사자 같은 공격성을 보인 것이다.

 

그 화풀이의 결과는 참혹하다. 좋은 취지로 <나는 가수다>를 만든 김영희 피디는 경질되었고, 엄청난 부담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가수들에겐 상처만 남았으며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은 사실상 그 생명을 다했다. 다시 재편성을 하더라도 이전과 같은 의미와 가치를 담을 가능성은 없다. 사안에 대한 이해 없이 함부로 그리고 습관적으로 비난에 동참하다보니 어느 순간 프로그램의 폐지와 변질이라는 전혀 원하지 않은 결과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림의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손가는 대로 그리다가 결국 그림을 망친 경우이다. 이 얼마나 한심하고 안타까운 상황인가. 메뚜기 떼가 지나간 들판처럼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이 황폐함이 아쉽고 아쉽다.

 

그리고는 말한다. 김영희 피디도 경질되고 김건모도 하차했으니 이제 그만 <나는 가수다>를 용서하자고.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 행세를 하는 엽기적인 장면이다. 또 <나는 가수다>를 잘 정비해 다시 방송해 달란다. 그러니까, 유례가 없을 정도로 특별한 방송이었던 <나는 가수다>를 여전히 공짜로 TV에서 보고 싶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애초에 엄청난 부담에도 불구하고 좋은 취지에 공감해 <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가수들의 입장을 최대한 배려하고 존중했어야지. 축제의 흥을 깨고 판을 엎어놓고 그래도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인간이라면 염치를 먼저 알아야 한다.

 

(2) <나는 가수다>에 적대적인 태생적·환경적 맥락

 

나는 <나는 가수다> 첫회를 보고 이미 알 수 있었다. "이건 인간적이구나! 이건 전복적이구나! 이건 예술이구나!" 아마 다른 사람들도 <나는 가수다>가 놓인 맥락을 바로 직감했을 것이다. 태생적으로 적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 적은 크게 이미 기득권을 형성한 구세대, 아이돌 관련자와 팬, 기존 서바이벌 프로그램 관련자와 팬, 경쟁 방송 프로그램 관련자와 팬, 기타 등등이다. 이건 얘기가 너무 길어지고 부족하나마 이미 써놓은 글이 있으니 링크로 대신한다. 

 

- 예술적인 <나는 가수다>: http://yonggwan.net/225

- 인간적인 <나는 가수다>: http://yonggwan.net/233

 

아마도 <나는 가수다>를 본 후 <위대한 탄생>, <슈퍼스타K>, 아이돌 무대를 본 시청자라면 감흥이 예전같이 않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가수다>는 그만큼 폭발적으로 강한 엔진이 탑재된 전복적 프로그램이었다.

 

(3) <나는 가수다> 사태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여론주도층

 

<나는 가수다>에 대한 비판이 있다기에 꽤 많은 글과 기사를 검색해 읽어보았다. 하지만 그 중 전문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대중문화에 대한 식견과 이해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원곡 그대로 전해주는 <라라라> 같은 전문음악프로보다 노래 사이에 인터뷰를 넣고 심지어 노래를 자르기까지 하는 <나는 가수다>를 보며 사람들이 왜 더 감동을 받는지조차 모르는 문외한들이 대다수였다. 읽어보니 내용이 정말 가관이었다.

 

문화와 예술은 이론과 실기가 결합된 매우 섬세하고 전문적인 분야라서 관련해 비평을 하려면 전문적인 지식은 물론이고 문화예술인에 버금가는 예술적 재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게 우리나라에선 딱히 전문분야가 없는 사람들이 손쉽게 선택해 부담 없이 글을 쓰는 영역이 이른바 "문화 평론"이다. 써놓은 글을 읽어보면 사안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개인적인 의도와 편견만 가득한 시청소감 따위에 불과하다. 이러니 문화예술의 발전은 고사하고 관련해 어떤 이슈가 터졌을 때 뭐하나 제대로 정리되거나 봉합되지 않고 논란만 가열되다 모두가 패배자로 상처만 남게 되는 것이다.

 

얄팍한 이해수준으로 광기어린 비판에 동참하더니 이제와서 '너무 과했나'라며 반성을 촉구하는 태도는 또 뭔가. 여론 지형의 등고선을 보면서도 여론이 흘러갈 방향과 결과가 예측이 안되는 수준이라면 애초에 나서질 말았어야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어떤 사회에서 여론이 도덕적, 합리적, 생산적으로 흐르지 않고 있다면 이는 여론주도층 혹은 여론관련 직군이 무능하거나 게으르거나 부도덕하기 때문이다. 대중의 잘못은 그리 크지 않다. 자격 없는 사람들의 발언권은 축소되어야 한다. 스킵(skip)과 무관심이 답이다.

 

8.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가수다>는 김영희 피디니까 만들 수 있었던 프로그램이다. 문제가 된 재도전 허용 결정도 김영희 피디가 국장급 피디였고, 그런 국장급 피디가 가수들의 입장을 최대한 존중해주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항간의 비난과는 달리 솔직히 가수를 이정도로 극진히 대접해준 예능은 이전에 없었다. 나는 그런 모습이 참 보기 좋았으나 그 김영희 피디가 원칙을 어겼다는 불명예를 안고 사실상 경질되었다. 가수들을 극진히 대접하다가 자기 스스로에 대한 방어에 실패한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가수가 아니라 서바이벌이라는 방송포맷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나는 가수다>의 주인공이 가수들 스스로가 아니라 서바이벌이라는 방송포맷이 된다면, <나는 가수다>는 존재의 가치를 잃고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던 것처럼 기성가수들을 이용한 자극적인 서바이벌 쇼프로에 불과해진다. 이런 프로그램에서 가수들이 행복할 리도, 이런 프로그램에 좋은 가수들이 나올 리도, 이런 프로그램이 오래갈 리도 없다. 

 

애초에 <나는 가수다>는 가수들에 의한, 가수들을 위한, 가수들이 행복한, 가수들의 프로그램이 되어야 했다. 규칙을 정하고 수정하는 최종적인 결정권은 시청자가 아니라 당사자인 가수와 제작진에게 있어야 했다. 시청자는 그들을 길들이고 그들에게 규칙 준수를 압박하는 권력이 아니라 그들의 공연장을 찾은 팬들처럼 그들이 정성껏 준비한 공연을 마음껏 즐기는 관객으로 충분했다. 당사자인 가수와 제작진의 결정조차 이정도로 존중받지 못하는 프로그램이라면 나는 응원할 마음이 전혀 없다.

 

각설하고, 불필요한 사회적 논란을 막거나 이미 발생한 논란을 연착륙시키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1)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라. (이미 이 단계는 지났다)

(2) 고름은 살이 되지 않는다.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잘못된 일을 원상복귀 시킬 수 있다면 원상복귀 시키는 게 옳다. 김영희 피디는 다시 복귀해야 한다. 그리고 김건모의 명예는 반드시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 무개념 네티즌과 언론 종사자는 김건모 앞에 진심으로 사죄하라. 하다못해 아고라 청원이라도 해서 사죄의 성의를 보여라.

 

이게 힘들다면 <나는 가수다>에 출연하던 가수들 역시 하차하는 게 바람직하다. 가능하다면 유사한 프로그램이 제작되더라도 출연하지 않겠다는 공감대를 다른 동료 가수들과 공유하는 게 좋겠다. 당사자인 가수와 제작진의 결정조차 이정도로 존중받지 못하는 방송은 존재해선 안 된다. 이미 자기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명망 있는 가수들이 개념 없는 쇼프로의 방송재료로 자극적으로 소비되어선 안 된다. 혹시 지금의 <나는 가수다>에 미련이 남더라도 어쩔 수 없다. 안타깝지만, 고름은 결국 살이 되지 않는다.

 

네티즌은 물론이고 우리 모두에게도 반성과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약간 시간이 흐른 후에, 김영희 피디와 가수들이 <나는 가수다>를 다시 시작하면 좋겠다. MBC에서 안되면 SBS나 KBS로 옮겨도 상관없다. 기다리다가, 그때가 되면 나는 다시 <나는 가수다>를 응원할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이런 방송을 보며 감동을 받을 자격이 없다. 

 

******

 

이 글이 <나는 가수다>와 관련해 내가 쓰는 마지막 글이 될 것 같다. 좀 더 정리할 문제가 남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선 굳이 정리해야 할 이유가 없다. 혹시 첨가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나중에라도 이 글을 수정해 첨가할 생각이다.

 

- [3.26.18:12] "2. 약속과 설명에 대하여" 추가

- [3.26.23:37] "4. 청중 평가단의 투표가…"에 '글쎄요'님과의 토론 내용 추가

- [3.27.10:56] "5. 출연자들의 언행과…"에 '희한한 원칙의 정의'님과의 토론 내용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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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YG
2011/03/09 22:07

'결핍'과 '과다'는 항상 반작용을 낳고 이런 반작용은 구체적인 형태로 고도화 된다. 이런 고도화-체계화-형상화 작업은 보통 사상가와 예술가들이 담당한다. 예컨대 공자가 중국에서 나온 이유는 과거 공자 당시의 중국에 도덕과 윤리, 즉 인륜이 없었기 때문이고 현대 문화이론과 현대 예술의 난해함은 세계대전을 초래한 전체주의에 대한 반작용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기에 결핍이나 과다인 상황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심지어 더욱 강화·공고화 시키는 사상가와 예술가는 사상가와 예술가가 아니라 그저 지식·감성 전문가(기술자)일 뿐이다. 


문제는 '사상가·예술가'와 '지식·감성 기술자'를 구별하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도'와 '결과'는 다르게 나타나기 일쑤라서 '누가 실제로 사상가·예술가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는가'에 대한 평가는 어차피 결과론이 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이는 후대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글은 그 논조가 어떻든간에 그 논리가 어떻든간에 그저 공허하다. 하나마나한 얘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하는 얘기다. 최소한 '의도'의 진정성만큼은 정상참작하기 위해서. 또 기억하기 위해서. 

편의상 가수와 아이돌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자. 


- 가수: 노래를 제대로 부르는 전문가(specialist).
- 아이돌: 노래도 곧잘 부르는 예능인(entertainer). 


MBC에서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만약 <나는 가수다>에 나오는 가수들이 아이돌과 비교해 극명한 수준 차이를 증명한다면 상대적으로 침체된 가수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나, 반대로 이미 일가를 이룬 내로라하는 가수들의 무대조차  아이돌의 무대와 별 차이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전설은 사라지고 아이돌로의 대세이동이 가속화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설들이 실력으로 현 아이돌을 압도할 것이라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MBC<놀러와-세시봉 콘서트>에서도 추억상기 그 이상의 감흥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걱정은 이소라씨의 무대만으로도 바로 사라졌다. 방송은 결핍에 힘을 실어줘 '균형'을 찾아가는 예술적 기능을 수행하더니, 심지어 '조화'라는 음악의 본질적 기능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사실 음악의 기능에 대해 가장 적절한 분석을 시도한 사람은 앞서 언급한 공자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은 공자 이후 사람일뿐더러 그 깊이가 (내가 보기에) 공자만 못하다. 다음은 공자의 음악이론을 정리한 《禮記 樂記》에 나오는 글귀다.   


"음악(樂)이란 같아짐을 위한 것이요, 예(禮)란 달라짐을 위한 것이다. 같아지면 친해지고, 달라지면 공경하게 된다. (樂者爲同, 禮者爲異. 同則相親, 異則相敬)" 


공자에게 있어 예(禮)와 악(樂)은 서로 짝개념이다. 여기서 예란 춘추전국시대 당시 사회 개혁을 위한 공자 사상의 실천적 무기였다. 즉 공자는 사상이 차이를 드러내는 것에 치중해 전복을 위한 이론적 추동력을 제공한다면, 음악은 동질감 형성에 치중해 조화를 위한 공감대를 제공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서구의 흑백 이분법이 만연한 요즘이기에, 이 조화라는 가치 역시 '결핍'의 상태에 놓여있던 것이다.


만약 <나는 가수다>가 아이돌이나 아마추어에 대한 기술적 우위를 드러내 가수의 권위를 강화시키는 쪽으로만 흘렀다면, 그렇게 차이를 강조하여 가수와 아이돌 시장의 구분을 강화하는 쪽으로 흘렀다면, 나는 <나는 가수다>에서 지금만큼의 감동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음악의 본질적 기능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가수다>는 이미 일가를 이룬 가수들을 긴장하고, 실수하고, 예능도 해야 하는 존재로 여과없이 담음으로써 아이돌과의 차이를 오히려 좁히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가수들에게 힘을 실어줘 결핍을 채워주는 동시에 아이돌과의 거리를 좁혀 화해를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가수와 아이돌 시장이 완전히 분리되면 아이돌은 굳이 가수를 흉내 낼 필요가 없다. 일본의 경우처럼 노래를 잘할 이유도 음악적 성취를 이룰 이유도 없다. 소위 "오덕후"라는 손쉬운 시장에만 집중해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가수, 그 중에서도 자타공인 "최고"라 할 수 있는 7인의 대가들이 한 발짝 아이돌의 영역에 다가서 줌으로써[爲同], 그리고 압도적인 기량차이와 감동을 선사함으로써[爲異], 공경의 마음을 발생시켜 재능 있는 아이돌이 아이돌이라는 보호막 속에서 안주하기 보다는 대가들이 보여준 신세계를 향해 도전할 동기를 부여해준 것이다. <나는 가수다>를 통해 대가들이 내밀어준 손은 아이돌에겐 자기 계발을 위한 은총이다.


이처럼 <나는 가수다>는, 지금 시점에서 내가 보기엔, 그동안 '결핍'의 상태였던 가수들에게 힘을 실어줘 '균형'을 찾아가게 만들었고, 가수와 아이돌로 지나치게 시장이 구분됨으로써 발생한 갈등을 줄여 주었고, 가수와 아이돌이 서로에게 한 발짝씩 다가서게 만들어 '조화'를 위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가수다>라는 "쇼프로그램"은 음악의 기능과 힘을 잘 활용한 충분히 예술적인 방송이다. 그래서 <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가수는 '예술적인 가수'이고 <나는 가수다>를 제작한 제작진은 '예술적인 제작진'이다 -라고 생각한다.


******


[3월 21일 추가]


쓰는 김에 <나는 가수다> 2회 시청 후기도 같이 쓴다. 논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세대론(世代論)을 굳이 빌려 오자면, <위대한 탄생>이나 <슈퍼스타k>같은 기존의 오디션 프로그램은 이미 자리를 잡은(기득권을 형성한) 심사위원(구세대)이 오디션(면접)을 통해 사회 진출을 준비하는 가수지망생(신세대)을 심사(평가)해 기존 업계에 편입시켜 주거나 자격을 부여하는 시혜적 형식의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심사위원들은 자신의 능력을 오디션이나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검증받은 케이스가 아니다. 또 그들이 쌓은 커리어는 엄밀히 말해 음반 시장이 좋았을 때 형성한 것으로, 음반시장이 극도로 침체된 최근엔 대박 히트곡을 낸 적이 없다. 반면 오디션 참가자들은 2011년 현재의 음악판에서 커리어를 쌓고 성공을 일구어야할 사람들이다.


요컨대 심사위원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일가를 이룬 뛰어난 가수이자 음악인들이라는 것은 틀림없으나 그들의 성공은 시대를 잘 만난 것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기에, 그들의 안목과 멘토링 방식이 예비 음악인들의 성장과 발전에 정말로 적절하고 합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검증받은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사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오디션 참가자들의 당락을 결정하는 권리를 마음껏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반면 <나는 가수다>는 기성음악인 정도가 아니라 이미 일가를 형성한 내로라하는 대가들 스스로가 심사위원(면접관)의 자리에서 내려와 심사대상을 자청한 케이스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기존의 오디션 프로그램이 '체제 순응적' 내지는 '보수적'이라면 <나는 가수다>는 '체제 전복적' 내지는 '혁명적' 프로그램이다. 서바이벌 쇼프로그램이라고 해서 다 같은 서바이벌 쇼프로그램이 아니라는 말이다. 솔직히 어떻게 이런 프로그램이 가능해진 것인지조차 잘 모르겠다.


게다가 그 심사는 세대별로 배분한 500명의 일반 대중이다. 이게 중요하다. 애초에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보편적 기술이 곧 '대중성'이다. 또 성공적으로 대중성을 획득한 과거의 여러 사례들을 분석해 나름의 체계화된 이론과 기술을 가지게 된 사람을 대중문화 전문가라고 하는데 <위대한 탄생>이나 <슈퍼스타k>의 심사위원들이 바로 그들이다. 즉 심사위원들은 민의를 대변한다는 국회의원들처럼 대중의 기호를 대변해 오디션 참가자들의 당락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이 대중의 기호를 제대로 대변하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반면 <나는 가수다>는 심사위원이 대중 그 자체이기에 대중의 기호가 왜곡될 가능성이 낮다. 그 수가 500명에 불과할지라도 그들의 선호도 조사는 말 그대로 대중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당이 대선후보를 결정할 때 정당 중역이 자신의 감을 믿고 특정 후보를 내정하는 것과 대국민 경선을 치르는 것만큼 다른 얘기다.


개인적으로 지난 <나는 가수다> 1회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았던 무대는 김건모의 <잠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였다. 아시다시피 이 곡은 김건모의 데뷔곡이었다.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오른 김건모가 서바이벌 '쇼'프로그램(음악프로그램이 아니다!)에 출연해 자신의 대표곡으로 <잘못된 만남> 등의 메가 히트곡이 아니라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데뷔곡을 부른 것이다. 그런 모습에서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김건모의 바람이 전해졌던 것이다.


트위터에서도 썼던 얘기지만, <나는 가수다> 역시 초심을 잃지 않길 바란다. <나는 가수다> 김영희 CP는 예전에 <이경규가 간다>를 통해 청소년을 성인만화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서점에서 만화책을 몰아내고 만화의 유통체계를 붕괴시키는 데 일조했고, <느낌표>를 통해 좋은 책을 많이 읽자는 명분으로 만화는 책이 아니라는 식으로 폄훼했다가 결국 사과까지 한 전례가 있다. 즉 김영희 CP가 제작한 예능은 명분은 좋으나 그 방식이 너무 거칠고 심지어 마녀사냥식일 때가 있어 종종 문제를 일으켰던 게 사실이다.


그럴 리 없겠지만, 이번 <나는 가수다>는 기성가수들의 실력을 부각시키기 위해 아이돌이나 비주류·인디 음악인을 희생 제물로 삼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가수다> 1회를 정말 감동적으로 봤기에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


 

[4월 12일 추가]


다음은 <아레나>에 실린 가수 박정현의 <나는 가수다> 출연 취지다. 윗글의 논지와 대체로 일치한다.


"'잘못된 것'이라는 건 없다. 이소라 씨도 20대 초반에 <위대한 탄생>같은 프로그램에 나갔다면 좋은 평가 못 받았을 것 같다. 자기 개성을 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전설적인 가수가 된 거잖아. 그래서 <나는 가수다>에 출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우리도 보여줄게, 기성 가수라는 게 벼슬은 아니야' 이런 것들. 물론 막상 나갔는데 아마추어들과 비슷하다는 말 들으면 어떡하나 싶기는 했지만. 하하." (박정현, 아레나, 2011년 4월호)
 

[8월 31일 추가]


다음은 <한국일보>에 실린 김영희PD의 인터뷰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역시 윗글의 논지와 대체로 일치한다.


-요즘 오디션 프로그램 홍수인데 어떻게 보는지.


"안 좋게 봐요. 싫어, 나는. 일반인들 데리고 모질게 경쟁을 시키는 것은 너무 싫어. 어차피 유행이라면 오디션 프로도 좀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오로지 그냥 누가 떨어지느냐 살아남느냐에만 포커스를 맞춰 그것만 보게 하니까. 바뀔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근데 우리나라 시청자들은 진짜 이중성이 있는 것 같아. 욕해서 그걸 시정하면 안 봐. 참 희한해. '나가수'도 제일 논란이 될 때가 집중도가 높았고. 하하."


-'나가수'도 큰 틀에서는 오디션 형식인데.


"경쟁을 하는 것뿐이지 오디션은 아니에요. '잘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좀 모질게 경쟁을 해도 괜찮다' 생각했죠. 기득권세력에게 자극을 줬을 거예요. 실력이든 돈이든, 가진 자들의 경쟁. 그동안 없었잖아요. 이런 건 좀 해야 돼. '나가수' 가수들도 나와서 다시 한번 정신 재무장을 하잖아요(웃음)." (김영희 PD "입사 때부터 예능이 방송 석권할 거라 확신", 한국일보, 201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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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YG
2011/02/16 11:20

컴퓨터 게임을 폭력성과 연관시키기 위한 MBC<예능데스크>의 무리수로 말이 많나보다. 이 글은 관련해 적는 짧은 생각이다. 나는 만화가니까 만화에 대해 한정해 적지만 결국 게임이나 만화나 비슷한 상황이다. 

글이 길어지니 결론부터 적는다: 


1. 심의는 규제가 아니라 평판(정보 제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2. 심의는 업계 전문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3. 만화계도 민간자율심의제도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

 

학문과 표현의 자유라는 것은 "국가권력으로부터 학문·예술에 대한 불법이나 부당한 제한 또는 간섭을 받지 아니할 국민의 기본권"이다. 다른 자유와 마찬가지로 표현의 자유 역시 무조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원칙적으로 책임이 따르지 않는 자유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인 권리로서 무조건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어느 정도 힘을 얻어왔다. 왜냐하면 학문이나 예술은 현실의 비판과 진리탐구가 그 본질이기에 역사적으로 사상가와 예술가들은 지배 권력으로부터 억압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사상·표현의 자유를 헌법에 명시해 특별하게 보장하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근대는 소수 엘리트들의 시대였다. 그 소수 엘리트들에 의해 문화와 정보가 생산되어 그들이 가진 매체를 통해 유포되었다. 다시 말해서 '표현'과 '유통'의 주체는 소수의 엘리트들이었고 다수 대중은 그저 일방적 수용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렇게 소수의 전문가 그룹이 일정한 매체를 통해 인류이성에 근거한 절대적 가치들을 다수의 대중들을 상대로 가르치던 시기, 즉 수직적 계몽주의가 유효하던 근대까지는 "표현과 사상의 자유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도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 소수의 입을 누군가가 막아버린다면, 진실은 너무도 쉽게 묻혀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만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 앞집 백수총각보다 덜떨어진 소리를 하는 시대이고, 그 누구도 진리를 확신하지 못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이고, 누구나 자기 미디어를 가질 수 있는 일인미디어의 시대이고, 문화와 지식을 창조·가공·유통하는 주체가 대중 스스로인 인터넷 기반의 네크워크 시대이다. 대중들은 문화의 생산자로서의 지위를 한없이 누리는 반면 기존의 엘리트들은 오히려 이 대중들이 창조하는 문화를 재생산해 살아가고 있는 형편이다. 바야흐로 희소성의 귀족문화에서 보다 저렴한 대중문화로, 보다 저렴한 대중문화에서 무한복제가 가능한 디지털 문화로 문화의 무게중심이 옮겨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여전히 "절대적인 권리로써 무조건적으로 보장되는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 18세기 수준의 엘리트주의에 빠져있다는 자기고백에 다름없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은 대중 전체가 아니라 스스로 지식인 혹은 전문가라 자처하는 소수의 전문가그룹들의 학문·예술의 자유만을 고려의 대상으로 삼을 때에만 겨우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모든 대중의 모든 형식의 표현이 모두 허용된다면 사회의 공공복리와 질서가 제대로 지켜질 수 있을까? 당연히 불가능하다. 


이상의 이유로, 표현의 자유는 신성불가침의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는 점엔 나 역시 동의한다. 게다가 예술이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명제를 포기하지 않는 한, 또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 동물이라는 명제를 부정하지 못하는 한, 만화에 대한 심의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만화계가 당면한 과제는 표현의 자유와 표현의 책임 사이에 균형을 이룰 수 있게 심의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현재 만화에 대한 심의를 주관하는 정부 부처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로 사후심의를 원칙으로 한다. 요컨대 만화의 등급은 크게 3가지다. 모든 연령가/청소년 유해매체물(19세 미만 구독불가)/유해간행물(성인도 구독불가, 전량 회수 폐기). 출판사가 1차로 만화의 등급을 자율적으로 정해 출판한다. 그 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사후심의를 해서 특정 만화의 등급을 재조정한다. 이런 식으로 등급 재조정 결정이 나면 그 횟수에 따라 차등적으로 출판사는 벌금을 내는 방식이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에 대한 책임은 굳이 벌금, 판매금지 등 법적 제재가 아니더라도 가능하다. 예컨대 누군가가 문제의 소지(선정성, 폭력성, 반사회성)가 있는 이른 바 "막장 작품"을 발표했다고 치자. 예전 같으면 비전문가인 심의위원과 검찰 등에 의해 판매금지와 형사고발이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작품 자체를 놓고 전문가들이 모여 토론을 진행하는 것이다. 그 결과 정말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그저 이러저러한 이유로 문제가 있다고 발표하는 것이다. 즉 법적 제재를 통한 규제가 아니라 평판을 통한 정보제공으로 대중의 자정기능을 강화시키자는 말이다. 


그런 전문가들의 분석에 동의하는 대중이 많아지고 그런 막장 작품에 대한 지지와 소비를 줄이게 된다면 결국 막장 작품을 내놓은 작가의 평판은 나빠지고 수입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자기 작품이 대중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없이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그저 자극적,선정적,폭력적 장면을 구상하는데에만 몰두하거나 무책임하게 그릇된 가치관을 전파하는 행태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막장 작품이라 더 많은 수입을 얻을 가능성도 있으나 명예까지 얻지는 못하기에 나름의 의의는 있다. 작가가 작품 활동을 책임 있게 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방편은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전문가들이 막장을 막장이라고 분류해 주지 않으니까 비전문가들이 어설프게 심의를 시도하게 되는 것이고 그 결과 진짜 막장 작품은 걸러내지도 못하고 애꿎은 작품들만 피해를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성기가 노골적으로 전시되고, 뇌수가 터져나와도 그 장면이 놓인 맥락에 따라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은 전혀 달라짐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심의에선 맥락이 너무 무시되었던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본문의 전문가는 누구를 말하는 건가? 만화에 대한 분석은 만화가들이 제일 잘한다. 직접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들은 작품의 연출만 봐도 작가의 의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만화가-평론가-학계인사로 구성된 그룹이라면 전문가의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당연히 이 그룹은 만화계 내부의 자율적인 민간심의위원회의 형태가 될 것이다. 따라서 만화계는 만화에 대한 심의 자체를 반대할 게 아니라 만화에 대한 심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심의 기구를 만화계 안으로 가져오는 데 노력을 기울이는 게 보다 현명하고 실속있는 처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나치게 짧은 생각이라 오해의 소지가 많다. 읽는 분들의 호의를 기대하며 충고나 조언 역시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  


생각난 김에 덧붙이자면, 예전에 호러물을 준비할 때 얘기다. 당시 시체나 사고 장면의 보다 리얼한 묘사를 위해 사진자료 등을 모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자료가 쌓일수록 점점 더 우울해지더니 급기야 창작의 의욕마저 잃고 말았다. 이런 끔찍한 자료들을 매일 접하며 살고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준비하던 작품을 접었다. 이런 나이기에 <퇴마침> 5권의 해부 장면을 그릴 땐 독자가 장면과 정서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마치 해부학 실습교재처럼 인체를 표현했다. 


 

만화가라면 알겠지만 시각적 충격을 위해 잔인하고 끔찍한 장면으로 연출하고 싶었다면 절대 이런 식으로 그리지 않는다. 먹을 많이 사용해 조직과 기관이 깨끗하게 드러나지 않는 끈적끈적한 핏덩이와 살덩이로 표현하지. 그리고 실제 사체나 해부 장면에 대한 사진이나 다큐를 보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 그림은 과학실에 놓인 실습인형과 닮았을 뿐이다. 만화가라면 내 고민과 의도를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전작 <퇴마침>은 중학생들의 감성에 맞춰 중학생들이 가장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그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 해부 장면의 묘사로 인해 5권부터는 19금 판정을 받았다. 이는 퇴마침을 출판한 <대원CI>의 자체 심의 결과로 보이는데, '모든 연령가'로 책을 냈다가 후에 심의 결정을 맞으면 회사에 불이익이 따르기에 알아서 자체검열을 한 것이다. 심의 제도를 개선하지 못하면 이런 일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예전에 어떤 만화평론가에게 심의 때문에 만화가들이 힘들다고 했더니, '그건 과거의 기억과의 싸움일 뿐이니,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서 19금 붙여 팔라'고 했다. 19금이 아닌 내용조차 19금 결정이 나니 문제를 삼는 것인데 그분은 뭐가 문제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홈페이지에 가보면 청소년유해매체로 결정난 수많은 만화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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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YG
2011/02/11 04:28

故 최고은 님 사건에 충격을 받아 사태파악을 위해서 관련 통계나 보고서 등을 뒤적거리다가 어처구니없는 문구를 하나 발견했다. 


우선, 6차 개정된 한국표준직업분류를 보자. 예술인 관련 직업군엔 분명 "만화가"가 있다. 정확한 코드번호는 28431 이다. 그리고 "만화스토리 작가"는 28119 다. 아래 2843과 2811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가면 있다. 


 (통계청 한국표준직업분류)

 

그런데 한 보고서엔 다음과 같은 표가 들어 있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보이는가?  


만화가가 포함된 2843 코드가 아예 사라져 있다.
2842 (사진기자 및 사진가) 다음에 바로 2844 (국악 및 전통 예능인)가 나온다. 


처음엔 무슨 착오가 있었는지 알았다. 왜냐하면 "만화스토리 작가"는 2811 코드에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표 밑에 다음과 같은 참조가 달려있었다. 


 

"만화가를 예술가에 포함시킬 것인지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라니? 만화는 예술 장르가 아니라는 말인가? 아니면 "만화스토리 작가"는 예술가이지만 "만화가"는 예술가가 아니라는 말인가? 


본문에 언급된 보고서는 2007년 12월 5일 있었던 <예술인 복지 증진을 위한 정책포럼> 중 <예술인의 직업적 특성과 사회복지 실태>이고, 보고서 작성자는 박영정(한국문화관광연구원 예술정책팀장)이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은 <문화관광부> 산하 정책연구기관이다. ☞ http://www.kcti.re.kr/ 


그러니까 복지를 증진시켜 줄 "예술인"의 범주에서 굳이 만화가는 제외하겠다는 것인가?  이렇게 조금만 방심해도 뒷통수를 치니 어디 두고보자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 


그런데 예술인에게 4대보험을 보장하고, 예술인이 활동지원기금을 마련하거나 예술인복지재단을 설립할 수 있도록 하는 걸 골자로한 <예술인 복지법>이 지난 2009년 10월에 국회에 제출되었으나 정부 부처의 반대로 현재 국회 계류 중이라고 한다. ☞ http://mtz.kr/f5s0 


그렇다면 <예술인 복지법>의 "예술인"엔 만화가도 포함될까? 


법안을 대표 발의한 민주당 서정갑 의원의 홈페이지(☞ http://www.suhgabwon.net/ )에 가서 관련 법안을 다운받아 읽어보았다. <예술인 복지법 제정안>은 "예술인"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예술인”이란 예술활동, 곧 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표현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여 국가를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데 공헌하는 자로서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를 말한다.
1. 「문화예술진흥법제2조제1항제1호에 따른 문화예술 분야에 창작, 실연(實演), 기술지원, 행정지원 등의 방식으로 참여하는 자
2. 「문화예술진흥법제2조제1항제1호에 따른 문화예술 분야에서의 활동을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증명할 수 있는 자
3.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예술관련 단체의 회원으로 등록된 자
4. 그 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자 


문화예술진흥법 제2조제1항제1호의 문화예술 개념은 다음과 같다. 


1. "문화예술"이라 함은 문학, 미술(응용미술을 포함한다), 음악, 무용, 연극, 영화, 연예, 국악, 사진, 건축, 어문 및 출판을 말한다. 


위 정의에 '만화'가 포함되는지 불분명하다.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검토해 보았을 때 포함되지 않는다는 쪽도 다수 있었다. 출판만화가는 "출판"이라는 항목에 어떻게 끼어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웹툰과 시사만화가 등은 어디에 들어가야 하나. 위 정의는 심지어 애니메이션조차 포괄하지 못한다. 


그래서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 위 법안이 마련되던 당시의 공청회와 토론회 자료를 찾아보았다. 다음은 2009년 7월 14일에 있었던 <예술인 복지제도 도입을 위한 토론회>에서 발췌한 표이다. 법안이 2009년 10에 제출되었으니 이 토론은 마지막 토론에 가까웠을 것이기에 개념 정리는 거의 끝났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일단 만화를 예술 장르로 인정해주고 있다. 시각예술 속에 만화가 포함되어 있다. 



 또 만화가를 예술가로 인정하고 있다. 작가에 만화스토리 작가가, 시각예술인에 만화가가 들어 있다. 



"만화=예술" 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이렇게 어렵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에 안타깝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예술인 복지법>의 취지로부터 배제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행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토론회에서 위와 같은 견해를 제시한 연구자가 누군지 찾아보았다. 



응? 박영정? 앞서 2007년에 "만화가를 예술가에 포함시킬 것인지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라는 의견을 내셨던 바로 그분이다. 왜 그래써어~ 2007년엔 왜 그래써어~ 화병 걸릴뻔 했자네~ 


끝으로, 유네스코가 1980년 제21차 총회에서 채택한 권고 내용이다. 


"예술가는 사회생활, 사회진보, 그리고 문화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로서 사회보장과 보험규정으로부터 적절한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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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YG
2011/02/09 01:26

故 최고은 작가님의 비극적 요절의 원인으로,

 

1. 스크린쿼터 축소에 따른 제작 여건 악화,

2. 제작사의 시나리오 묶어놓기,

3. 실업부조금 등 사회안전망 부재가 주로 거론되나 보다.  

 

그렇다면 정말 그런지 따져보자. 

 

1. 스크린쿼터 폐지 전/후 비교

 

고인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를 2007년에 졸업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스크린쿼터가 146일에서 73일로 축소시킨 영화진흥법 시행령이 발효된 게 2006년 7월 26일이다. 스크린쿼터란 한국 영화에 대한 의무상영 일수를 보장해 주는 것인데, 스크린쿼터 폐지 이후 영화 제작단가가 반 토막이 났다.

 

 

게다가 영화진흥위원회의 <2010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에 따르면, 지속적으로 증가하던 한국 영화의 시장점유율은 2006년 63.8%에서 스크린쿼터 축소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다가 급기야 2010년 46.5%까지 떨어졌다.  

 

 

또 제작편수는 증가했으나 투자금액은 2007년 이후 급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 1>에서 보듯이 매출은 상승 추세에 있었다는 말은 투자자·제작사·배급사의 수익을 보장하기 위해 시나리오 작가같은 영화 제작 인력들의 허리띠를 조르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투자자·제작사·배급사는 예전의 절반밖에 안 되는 제작비를 들인 영화를 더 많이 만들어 수익이 늘었으나, 제작사는 편당 제작비가 줄어든만큼 시나리오비를 아끼기 위해 "고통분담"이라는 명목으로 더 낮은 시나리오비를 제시하거나 선금만 미리 주고 잔금은 뒤로 미루는 꼼수를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크린쿼터 축소가 고인의 비극적 요절의 원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또 '한국 영화의 제작 편수는 더 늘었는데 시장점유율은 더 낮아졌다'는 것 역시 영화당 상영관과 상영날짜가 그만큼 적고 짧아졌다는 것이니, 제작인력의 수익구조가 스크린쿼터 축소 이후 더 악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흥행하면 늘어난 매출에 대해 시나리오 작가 등 제작인력에게 차후 재분배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비록 과거의 절반에 불과한 제작비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높아진 대중의 눈높이를 만족시키기 위해 제작사가 무리해서 끌어모은 최대치의 제작비일 것이다. 따라서 제작사의 상황 역시 그렇게 좋을 것 같지 않다. 실제로 많은 제작사가 회사 운영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요컨대 스크린쿼터 축소 이후, 투자자·배급사와 제작사·제작인력 사이에 양극화가 심화된 것으로 보인다.

 

2. 제작사의 시나리오 묶어놓기

 

언론 보도에 따르면, 상업영화 경력이 없는 신인 작가가 운 좋게 영화 제작사와 계약을 했을 때 시나리오 한 편 고료는 대략 2000만~3000만원인데, 제작사는 자체적으로 이 중 일부(가령 300만원)를 지급하고 시나리오 기획 개발을 시작하지만, 완성된 시나리오가 투자사의 관문을 통과할 확률은 10%를 넘지 않고, 따라서 신인 작가는 잔금을 받을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없다고 한다. (쓰고 싶다, 그 전에 살고 싶다, 조선일보, 2011.02.10)

 

따라서 2007년 이후 5개의 시나리오를 팔았으나 한 번도 영화화 된 적이 없는 고인의 경우 4년간 1500만원, 한 달에 대략 30만 원 정도 수입이 있었다는 말이다. 도저히 생계유지가 불가능한 금액이다. 만약 제작사가 시나리오 잔금을 모두 지불했더라면 한 달에 대략 200~300만 원 정도의 수입을 올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고인의 요절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잘못된 제작사의 시나리오 묶어놓기 관행도 비극의 원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3. 실업부조금 등 사회안전망 부재

 

작가들은 4대 보험 등 사회 안전망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 문화관광부가 스크린쿼터 폐지에 대한 대안으로 영화발전기금 신설을 제시하며 기금을 ‘영화 현장인력의 처우 개선 및 재교육을 통한 전문성 제고’를 위해 사용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지난해 443억원의 영화발전기금 사업비 중 인적 자원 육성과 근로 환경 개선에 쓰인 돈은 27억 1300만원(6.1%)에 불과했다.

 

만약 실업부조제도가 현실화 되어 고인이 최소한의 삶의 질이라도 보장받을 수 있었다면 작금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4년간 5개의 시나리오를 판 능력 있는 시나리오 작가가 굶주림 속에서 죽어가는 역설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실업부조금 등 사회안전망 부재 역시 비극의 원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국방, 식량과 마찬가지로 문화 역시 국가가 반드시 보호육성해야할 핵심 가치다. 식량주권이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문화주권이라는 말도 당연히 가능하다. 땅을 빼앗기면 살 공간이 사라지고, 식량이 부족하면 신체가 사라지고, 문화가 사라지면 혼이 사라진다. 아니 한류 현상에서 보듯이 문화가 곧 국가 경쟁력 그 자체다. 그런데 그 문화를 창조하고 선도하는 문화인은 정부의 정책부재로 인해 결국 운명을 달리했다. 직장인을 위한 실업급여는 가능한데 도대체 왜 문화인을 위한 실업부조금은 불가능한가!

 

"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

 

창작자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글이 이래선 안 된다. 세상 그 어디에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있겠냐만은 정말 이건 아니다.

 

고인은 스스로 "5타수 무안타"라며 자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나리오 작가가 5개의 시나리오를 팔았다면(언론보도는 다소 모호하다) 이미 5안타를 친 것이지 5타수가  아니다. 고인은 무능하지도, 무기력하지도, 실패하지도 않았다. 단지 사회시스템의 사각지대에 하필 놓여있었을 뿐. 그리고 사회의 불합리와 무관심 속에서,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채 져버렸을 뿐.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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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YG
2010/12/18 13:39

'뭔가 방향이 틀렸다'는 생각은 만화가로 데뷰한 시절부터 하고 있었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그럼 뭐야'라고 자문자답하며 조금이라도 더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을 경주하던 때, 전문성과 독창성을 작가의 최고 무기이자 보험으로 여기던 때, 노래 못하고 춤 못추는 SMAP이란 그룹이 2003년에 부른 한 노래는 혼란스럽던 내 머리속을 순식간에 정리해 주었다.

 

완성도는 기교에 불과하고 전문성은 소재에 불과하고 독창성은 양적 팽창에 불과할 뿐,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 본질은 맥락 속에서 파악되는 유의미한 메시지의 카타르시스적 체화(體化)였던 것이다. 메시지의 이해가 아니다. 이는 선(禪)적 깨달음이다. 이 이해가 아닌 체화는 너무나 강렬해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춤을 추고 기뻐 발을 구르게 만든다. 그리고 이후의 삶 자체를 완전히 변화시킨다. 따라서 어떤 작품을 접한 후에도 접하기 전과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그 작품은 예술로서는 실패한 것이다. 

 

다음은 하도 오래 차트에 머물러 "괴물꽃"이라고 불렸던, 일본 교과서에도 수록된, 나에겐 모나리자 그림보다 더 예술적이었던, <세상에 하나뿐인 꽃(世界に一つだけの花)>이라는 노래이다. 그 중 콘서트 영상을 골라 보았다. SMAP이 노래를 못불러서 더 예술이 될 수 있었으니 과연 기술적 완성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世界に一つだけの花 / SMAP

세상에 하나뿐인 꽃


 

花屋の店先に竝んだ いろんな花を見ていた

꽃가게 앞에 놓여진 여러가지 꽃을 보고 있었어요

 

ひとそれぞれ好みはあるけど どれもみんなきれいだね

사람마다 각각 좋아하는 꽃은 있지만, 모두다 예쁘네요

 

この中で誰が一番だなんて 爭うこともしないで

이 속에서 누가 제일 예쁜지 다투지도 않고

 

バケツの中誇らしげに しゃんと胸を張っている

바구니 속에서 자랑스러운듯이 꼿꼿이 가슴을 펴고 있어요

 

それなのに僕ら人間は どうしてこうも比べたがる?

그런데 우리들 인간은 왜 이렇게나 비교하고 싶어하나요?

 

一人一人違うのにその中で 一番になりたがる?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데도, 그 속에서 일 등이 되고 싶어하나요?

 

そうさ 僕らは 世界に一つだけの花

그래요, 우리들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꽃이예요

 

一人一人違う種を持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씨앗을 가져요

 

その花をさかせることだけに

그 꽃을 피우는 일에만

 

一生懸命になればいい

전념하게 되면 되요

 

困ったように笑いながら ずっと迷ってる人がいる

곤란한 듯이 웃으면서 계속 망설이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頑張ってさいた花はどれも きれいだから仕方ないね

힘들여 핀 꽃은 모두다 예쁘기에 어쩔 수 없죠

 

やっと店から出てきた その人が抱えていた

겨우 가게에서 나온 그 사람이 품에 안고 있는

 

色とりどりの花束と うれしそうな橫顔

가지 각색의 꽃다발과 기쁜 듯한 옆 얼굴

 

名前も知らなかったけれど あの日僕に笑顔をくれた

이름도 몰랐지만 그 날 나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었어요

 

誰も氣づかないような場所で さいてた花のように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그런 곳에서 피는 꽃처럼…

 

そうさ 僕らも 世界に一つだけの花

그래요, 우리들도 세상에 하나뿐인 꽃이예요

 

一人一人違う種を持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씨앗을 가져요

 

その花をさかせることだけに

그 꽃을 피우는 일에만

 

一生懸命になればいい

전념하게 되면 되요

 

小さい花や大きな花 一つとして同じものはないから

작은 꽃과 큰 꽃, 무엇하나 같은 건 없으니

 

NO.1にならなくてもいい もともと特別なOnly one

NO.1이 되지 않아도 되요, 원래 특별한 Only one


 


*****


하지만 나에겐 더없이 훌륭한 예술이었던 SMAP도 누군가에겐 그저 불쾌감만 줄 뿐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인기 아이돌그룹 스마프(SMAP)가 가창력 부재로 굴욕을 당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주간지 슈칸분슌(週刊文春·17일자)은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SMAP X SMAP’(후지TV) 녹화 도중 게스트로 나온 미국의 유명 록밴드 토토(TOTO)가 SMAP의 가창력에 문제를 제기, 불쾌함을 드러냈다.”고 보도했다.

이 날 녹화된 프로그램이 방송된 것은 지난달 24일. 이날 특별손님으로 초대된 TOTO의 리더이자 보컬인 스티브 루카서(Steve Lukather)는 리허설 도중 SMAP의 노래를 듣고 “이런 상태로는 같이 노래할 수 없다.”며 화를 낸 것으로 확인됐다.

슈칸분슌에 따르면 TOTO의 다른 멤버가 루카서를 달랜 후 녹화 스튜디오로 복귀시켰으며 루카서는 SMAP의 나카히 마사히로(中居正広) 등 2명의 멤버에게 30분 가량 보이스 트레이닝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美유명 밴드가 노래 교육”…SMAP ‘굴욕’, 서울신문, 2008.04.19)

 

SMAP으로부터 가창력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만약 노래 잘하는 토토가 준음치인 SMAP과 더불어 '화(和)'한 무대를 만들어 냈다면 그 또한 예술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토토는 '화(火)'를 냈고 메시지는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건 불쾌와 불화. 여기서 예술가와 장인이 구분되는 것이다. 장인은 권력자로 자신의 독선적 신념으로 타자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동일화를 획책하는 반면, 예술가는 이런 장인들의 '지배적 의미'를 부정하고 비판하는 방식으로 전체주의 사회에서 나다움을 조화롭게 지켜나간다.

 

정리하자면,

 

장인이 자기 신념을 타자에게 강요해 동일화를 획책하는 독선적 권력자라면, 예술가는 이런 장인들의 '지배적 의미'를 부정하고 비판해 전체주의를 극복하고 주체와 타자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저항적 비판자이다. 장인과 예술가가 구분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관리된 사회'에서는 지배와 억압이 보편화되면서도 의식되지 않는다. 따라서 선악이 분명해 "바리케이드를 세울 수 있었던 시대는 행복했다." (Theodor Adorno, Reflexion zur Klassentheo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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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YG
2010/11/10 21:09

가슴이 답답하다. 생각난 김에 써보도록 하자. 다음은 <한겨레>의 "‘달빛요정’의 외로운 죽음 뒤엔…음악인 피말리는 디지털 음원 시장이 있었다"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 디지털 음원, 어떻게 나눌까? 멜론, 엠넷 등 국내 음원 사이트들은 노래 한 곡을 내려받는 데 보통 500원을 받는다. 애플사의 아이튠스에서 곡당 1달러를 받는 것과 견주면 절반 수준이다. 음원 사이트는 이 가운데 보통 45%를 가져간다. 나머지 55%에서 저작권협회와 실연권협회에 들어가는 저작권료(9%)와 실연권료(4.5%)를 제하면 40%가량이 남는다. 여기에서 음원 유통 대행사 수수료를 뺀 뒤 제작사·음악인에게 돌아가는 돈은 200원 안팎이다.

아이튠스의 경우에는 아이튠스 쪽이 30%를 가져가고 70%를 음원 유통 대행사에 넘긴다. 대행사는 이를 제작사와 나누는데, 우리나라 음원을 아이튠스를 통해 외국에 판매하는 디에프에스비(DFSB)는 1달러의 절반 이상을 제작사에 돌아가도록 한다. 제작사와 음악인은 이를 받아 저작권료와 실연권료를 해결한다. 1달러를 1000원으로 환산하면 제작사와 음악인에게 최종적으로 돌아가는 몫은 400원이 좀 넘는다. 매출액의 40%가량을 음악인이 받는다는 점에서 분배 비율에 큰 차이는 없다. 』

기사링크 ☞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447790.html

정리하자면,

■ 국내 음원 사이트의 경우
- 소비자: 500원 지출
- 음원사이트: 225원
- 저작·실연권료+대행사 수수료: 67.5원+7.5원=75원
- 제작사·음악인: 200원 수입

아이튠스와의 직관적인 비교를 위해 소비자의 지출액을 1000원으로 상정해 보자.

- 소비자: 1000원(2곡) 지출
- 음원사이트: 450원
- 저작·실연권료+대행사 수수료: 135원+15원=150원
- 제작사·음악인: 400원 수입

■ 아이튠스의 경우
- 소비자: 1000원 지출
- 아이튠스: 300원
- DFSB+저작권·실연권료: 300원
- 제작사·음악인: 400원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소비자 입장에선 아이튠스에서 1곡 구입하느니 국내 음원 사이트에서 2곡 구입하는 게 더 이익이다. 게다가 지출액은 1000원으로 같고, 제작사·음악인의 몫도 400원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소비자가 굳이 아이튠스를 이용해야할 이유도 없다. 즉 지금 같은 유통 구조 아래에서라면 소비자는 국내 음원 사이트를 이용하는 게 더 합리적이라는 말이다. 게다가 아이튠스가 아니라 국내 음원 사이트를 이용하는 게 내수진작에 더 유리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국내 음원 사이트를 이용할 경우, 음원 사이트가 아이튠스에 비해 150원을 더 받고, 반대로 아이튠스를 이용할 경우, DFSB과 저작권·실연권 협회가 150원을 더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제작사·음악인의 이익 분배율은 고정되고 유통사 사이의 분배율만 달라진 것이다.

이는 업계 내에서 제작사·음악인의 몫은 40%로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다시 말해 이 40%라는 암묵적 관행을 깨지 않으면 문제의 해결이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실제로 45%를 받는 국내 음원 사이트에 비해 아이튠스가 30%라는 상대적으로 낮은 이익을 가져갔음에도 불구하고 제작사·음악인의 몫은 40%로 변함없었다.

그렇다면 제작사·음악인의 수익률을 개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 다운로드 가격을 올리고
2. 제작사·음악인의 이익 분배율을 높인다.

그렇다면 현 상황에서 적절한 비율은 어느 정도일까?
아이튠스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에 아이튠스를 기준으로 1곡당 가격과 이익 분배 비율을 책정해보자.

※ 아이튠스의 1곡당 가격: 1달러(지금 환율로 110원)
 
1. 1곡당 제작사·음악인에 돌아가는 비율을 아이튠스처럼 1달러의 대략 40%인 450원으로 올린다.
   (1곡당 수입이 200원에서 450원으로 늘어났다)
2. 국내 음원 사이트의 수입을 아이튠스처럼 300원으로 올려준다.
   (1곡당 수입이 225원에서 300원으로 늘어났다)
3. 저작·실연권료+대행사 수수료를 100원으로 올려준다.
   (1곡당 수입이 75원에서 100원으로 늘어났다)
4. 이 가격을 음원 다운로드 가격으로 책정한다.
   (1곡당 가격이 850원이 되지만 110원인 아이튠스에 비해 여전히 경쟁력 있음)
 
이정도 수준의 재조정이라면 이익 분배율은 대략 다음과 같아진다.

- 소비자: 850원 지출
- 음원사이트: 300원(35%)
- 저작·실연권료+대행사 수수료: 100원(12%)
- 제작사·음악인: 450원(53%)

지금에 비해 저작권자와 유통업체 모두 수익률이 개선되었고, 소비자는 지출이 다소 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이튠스에 비하면 저렴한 상황이다. 제작사·음악인의 수익을 개선시켜야 한다는 대중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면 이정도 조정과 타협은 그렇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게다가 저작권 자에게 돌아가는 비율을 일방적으로 올려도 유통업체는 아이튠스와의 가격 경쟁력을 고려해야 하기에 자연히 적당한 선에서 가격 조정이 이루어진다.

이게 불가능하다면 하다못해 다운로드 받은 곡만 스트리밍을 돌릴 수 있게 만들어도 저작권자와 유통업체 모두의 수익을 급격하게 개선시킬 수 있다. 다운은 자신의 PC로의 다운은 물론이고 다운받은 곡의 기록이 웹에 남아 언제 어디서든 해당 곡의 스트리밍이 가능하게 만들면 된다. 

이 다운로드 기록을 전산화해 음원 구입과 판매에 대한 기록을 일괄 관리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음원의 판매와 구입을 투명하게 파악해야 한다. 이를 근거로 정확한 저작권료를 지급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얘기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다운로드 가격을 현 500원에서 850원으로 올린다.
2. 제작사·음악인의 이익 분배율을 현 40%에서 53%로 올린다.
3. 다운로드 받은 곡만 스트리밍을 돌릴 수 있게 한다.
4. 투명한 유통 시스템을 만들어 저작권료 지급을 확실하게 한다.

그럼 위 <한겨레> 기사 중 대안 부분을 보자:

『 이에 일부 제작사들은 분배가 공정하게 이뤄지는 별도의 음원 유통 사이트를 만드는 방안을 논의중이다. 이응민 파스텔뮤직 대표는 “음원 사이트들이 하는 무료 쿠폰 행사의 경우 어떻게 정산되는지 도통 알 수 없다”며 “음원 사이트나 저작권협회가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 것도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으나 혼자서는 해결하기 힘들어 몇몇 레이블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있다”고 말했다. 싸이월드 관계자도 “이번 일을 계기로 인디밴드의 경우 수익이 아티스트에게 제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좀더 근본적인 개선책은 없을까? 인디음악 음원을 유통하는 이창희 미러볼뮤직 대표는 “지금처럼 정액제 서비스가 주가 되는 한 음원 시장이 더 발전하기는 쉽지 않다”며 “개별곡 다운로드 시장으로 중심이 옮겨가야 한다”고 말했다. 대중들의 인식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는 “지금의 음원 시장 구조가 형성되기까지는 대중의 인식 또한 크게 작용을 했다고 본다”며 “음악에 충분한 대가를 지불해야 더 좋은 음악이 많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좋아하는 음악에 지갑을 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기사의 대안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무료 쿠폰의 정산 등이 투명하게 이루어지는 새로운 음원 사이트를 만들겠다고 한다.
2. 음원 사이트나 저작권 협회의 투명한 정보 공개를 통해 누락된 수익이 없게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3. 정액요금제를 줄여 다운로드 시장을 활성화 시켜야 한다고 한다.
4. 대중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한다.

보면 알겠지만 위의 4가지 대안은 실제로는 대안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애써 외면하며 변죽만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1을 제외한 나머지는 구체적인 실현 기제가 없는 그저 당위의 나열일 뿐이다. 투명한 정보 공개를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 다운로드 시장을 활성화 시킬 수 있는 방법, 대중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야 비로소 대안이 되는 것이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님의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삼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이진원 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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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YG
2008/10/03 10:07

최진실.최수종 주연 MBC 드라마 (1992년) '질투'의 장면. << MBC제공 >>

내가 고등학생 때였나?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최진실은 <질투>라는 드라마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때 최진실은 미인의 대명사였는데, 지금으로 치자면 김태희 정도 되었을 것 같다. 나 역시 최진실을 보며 세상에 저렇게 예쁜 여자가 다 있을까 생각했었다.

어느 날, 학교 기숙사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TV를 보는데 최진실이 나왔다. 아... 예쁘다... 라며 정신없이 보고 있는데, 갑자기 저렇게 예쁜 사람도 10년, 20년 후에는 결국 늙어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아름다움이란 게 부질없는 허상처럼 느껴지더니, 점점 최진실을 감싸고 있던 아우라가 사라지고, 급기야 최진실과 식당의 요리하는 아줌마가 별 차이 없어 보이는 신비한 체험을 하고야 말았다.

너무나 순식간에 이루어진 체험이지만 얼마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는지 지금도 난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별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 예쁜 여자를 봐도, 잘 생긴 남자를 봐도 특별한 감흥이 없다. 심지어 김태희를 봐도 저렇게 생기면 사람들이 미인이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정도다.

이게 축복이라면 축복이고 저주라면 저주인데...
어쩌겠는가.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것을...

사람을 판단할 때, 외모에 대한 평가 항목이 사라지니 대신 성격이나 말주변 등이 주된 관심사가 되더라. 성격 삐뚤어진 거, 거짓말 하는 거,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는 채 횡설수설하는 거 정말 참아주기 힘들다. 이는 남녀와 노소, 미추를 불문한다.

이렇게 적고 보니,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최진실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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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Y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