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게임을 폭력성과 연관시키기 위한 MBC<예능데스크>의 무리수로 말이 많나보다. 이 글은 관련해 적는 짧은 생각이다. 나는 만화가니까 만화에 대해 한정해 적지만 결국 게임이나 만화나 비슷한 상황이다.
글이 길어지니 결론부터 적는다:
1. 심의는 규제가 아니라 평판(정보 제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2. 심의는 업계 전문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3. 만화계도 민간자율심의제도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
학문과 표현의 자유라는 것은 "국가권력으로부터 학문·예술에 대한 불법이나 부당한 제한 또는 간섭을 받지 아니할 국민의 기본권"이다. 하지만 다른 자유와 마찬가지로 표현의 자유 역시 무조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원칙적으로 책임이 따르지 않는 자유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인 권리로서 무조건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어느 정도 힘을 얻어왔다. 왜냐하면 학문이나 예술은 현실의 비판과 진리탐구가 그 본질이기에 역사적으로 사상가와 예술가들은 지배 권력으로부터 억압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사상·표현의 자유를 헌법에 명시해 특별하게 보장하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근대는 소수 엘리트들의 시대였다. 그 소수 엘리트들에 의해 문화와 정보가 생산되어 그들이 가진 매체를 통해 유포되었다. 다시 말해서 '표현'과 '유통'의 주체는 소수의 엘리트들이었고 다수 대중은 그저 일방적 수용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렇게 소수의 전문가 그룹이 일정한 매체를 통해 인류이성에 근거한 절대적 가치들을 다수의 대중들을 상대로 가르치던 시기, 즉 수직적 계몽주의가 유효하던 근대까지는 "표현과 사상의 자유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도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 소수의 입을 누군가가 막아버린다면, 진실은 너무도 쉽게 묻혀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만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 앞집 백수총각보다 덜떨어진 소리를 하는 시대이고, 그 누구도 진리를 확신하지 못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이고, 누구나 자기 미디어를 가질 수 있는 일인미디어의 시대이고, 문화와 지식을 창조·가공·유통하는 주체가 대중 스스로인 인터넷 기반의 네크워크 시대이다. 대중들은 문화의 생산자로서의 지위를 한없이 누리는 반면 기존의 엘리트들은 오히려 이 대중들이 창조하는 문화를 재생산해 살아가고 있는 형편이다. 바야흐로 희소성의 귀족문화에서 보다 저렴한 대중문화로, 보다 저렴한 대중문화에서 무한복제가 가능한 디지털 문화로 문화의 무게중심이 옮겨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여전히 "절대적인 권리로써 무조건적으로 보장되는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 18세기 수준의 엘리트주의에 빠져있다는 자기고백에 다름없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은 대중 전체가 아니라 스스로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소수의 전문가그룹들의 학문·예술의 자유만을 고려의 대상으로 삼을 때에만 겨우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모든 대중의 모든 형식의 표현이 모두 허용된다면 사회의 공공복리와 질서가 제대로 지켜질 수 있을까? 당연히 불가능하다.
이상의 이유로, 표현의 자유는 신성불가침의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는 점엔 나 역시 동의한다. 게다가 예술이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명제를 포기하지 않는 한, 또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 동물이라는 명제를 부정하지 못하는 한, 만화에 대한 심의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만화계가 당면한 과제는 표현의 자유와 표현의 책임 사이에 균형을 이룰 수 있게 심의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현재 만화에 대한 심의를 주관하는 정부 부처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로 사후심의를 원칙으로 한다. 요컨대 만화의 등급은 크게 3가지다. 모든 연령가/청소년 유해매체물(19세 미만 구독불가)/유해간행물(성인도 구독불가, 전량 회수 폐기). 출판사가 1차로 만화의 등급을 자율적으로 정해 출판한다. 그 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사후심의를 해서 특정 만화의 등급을 재조정한다. 이런 식으로 등급 재조정 결정이 나면 그 횟수에 따라 차등적으로 출판사는 벌금을 내는 방식이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에 대한 책임은 굳이 벌금, 판매금지 등 법적 제재가 아니더라도 가능하다. 예컨대 누군가가 문제의 소지(선정성, 폭력성, 반사회성)가 있는 이른 바 "막장 작품"을 발표했다고 치자. 예전 같으면 비전문가인 심의위원과 검찰 등에 의해 판매금지와 형사고발이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작품 자체를 놓고 전문가들이 모여 토론을 진행하는 것이다. 그 결과 정말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그저 이러저러한 이유로 문제가 있다고 발표하는 것이다. 즉 법적 제재를 통한 규제가 아니라 평판을 통한 정보제공으로 대중의 자정기능을 강화시키자는 말이다.
그런 전문가들의 분석에 동의하는 대중이 많아지고 그런 막장 작품에 대한 지지와 소비를 줄이게 된다면 결국 막장 작품을 내놓은 작가의 평판은 나빠지고 수입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자기 작품이 대중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없이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그저 자극적,선정적,폭력적 장면을 구상하는데에만 몰두하거나 무책임하게 그릇된 가치관을 전파하는 행태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막장 작품이라 더 많은 수입을 얻을 가능성도 있으나 명예까지 얻지는 못하기에 나름의 의의는 있다. 작가가 작품 활동을 책임 있게 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방편은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전문가들이 막장을 막장이라고 분류해 주지 않으니까 비전문가들이 어설프게 심의를 시도하게 되는 것이고 그 결과 진짜 막장 작품은 걸러내지도 못하고 애꿎은 작품들만 피해를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성기가 노골적으로 전시되고, 뇌수가 터져나와도 그 장면이 놓인 맥락에 따라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은 전혀 달라짐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심의에선 맥락이 너무 무시되었던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본문의 전문가는 누구를 말하는 건가? 만화에 대한 분석은 만화가들이 제일 잘한다. 직접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들은 작품의 연출만 봐도 작가의 의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만화가-평론가-학계인사로 구성된 그룹이라면 전문가의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당연히 이 그룹은 만화계 내부의 자율적인 민간심의위원회의 형태가 될 것이다. 따라서 만화계는 만화에 대한 심의 자체를 반대할 게 아니라 만화에 대한 심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심의 기구를 만화계 안으로 가져오는 데 노력을 기울이는 게 보다 현명하고 실속있는 처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나치게 짧은 생각이라 오해의 소지가 많다. 읽는 분들의 호의를 기대하며 충고나 조언 역시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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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난 김에 덧붙이자면, 예전에 호러물을 준비할 때 얘기다. 당시 시체나 사고 장면의 보다 리얼한 묘사를 위해 사진자료 등을 모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자료가 쌓일수록 점점 더 우울해지더니 급기야 창작의 의욕마저 잃고 말았다. 이런 끔찍한 자료들을 매일 접하며 살고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준비하던 작품을 접었다. 이런 나이기에 <퇴마침> 5권의 해부 장면을 그릴 땐 독자가 장면과 정서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마치 해부학 실습교재처럼 인체를 표현했다.
만화가라면 알겠지만 시각적 충격을 위해 잔인하고 끔찍한 장면으로 연출하고 싶었다면 절대 이런 식으로 그리지 않는다. 먹을 많이 사용해 조직과 기관이 깨끗하게 드러나지 않는 끈적끈적한 핏덩이와 살덩이로 표현하지. 그리고 실제 사체나 해부 장면에 대한 사진이나 다큐를 보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 그림은 과학실에 놓인 실습인형과 닮았을 뿐이다. 만화가라면 내 고민과 의도를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전작 <퇴마침>은 중학생들의 감성에 맞춰 중학생들이 가장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그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 해부 장면의 묘사로 인해 5권부터는 19금 판정을 받았다. 이는 퇴마침을 출판한 <대원CI>의 자체 심의 결과로 보이는데, '모든 연령가'로 책을 냈다가 후에 심의 결정을 맞으면 회사에 불이익이 따르기에 알아서 자체검열을 한 것이다. 심의 제도를 개선하지 못하면 이런 일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예전에 어떤 만화평론가에게 심의 때문에 만화가들이 힘들다고 했더니, '그건 과거의 기억과의 싸움일 뿐이니,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서 19금 붙여 팔라'고 했다. 19금이 아닌 내용조차 19금 결정이 나니 문제를 삼는 것인데 그분은 뭐가 문제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홈페이지에 가보면 청소년유해매체로 결정난 수많은 만화를 확인할 수 있다.